작가주의 영화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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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. (2009년 10월) |
작가주의 영화에 대해 설명한다.
프랑수아 트뤼포가 <카예 뒤 시네마>에서 <프랑스 영화의 한 경향>이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등장. 트뤼포는 당시에 단지 장인수준에 머물렀던 프랑스 일부 감독들, 르누아르, 브레송, 막스 오풀스, 장 콕토 등과 같은 감독들에게 작가라는 호칭을 붙이기 시작했다.
헐리우드에서 B급영화를 찍던 감독들을 '재발견'하게 되면서 그들을 작가라고 부르게 된다.
프랑스 누벨바그
[편집]1950년대 말에 등장한 프랑스 영화의 새로운 흐름. 당대 틀에 박힌 주류영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새로운 경향의 영화 운동, 즉 누벨 바그 Nouvelle Vague 운동이 시작.
- 누벨 바그의 특징
- 문학에 의존한 각색영화와 엄청난 물량을 투입한 시대물 등을 거부하고 저예산으로 영화 제작.
- 이를 위해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게 되면서 감독의 개인적 창작의 논리가 강조되었고, 내러티브의 전개에 있어 기승전결 식의 잘 짜여진 구성을 거부.
- 고급문학의 각색 피하고, 삼류소설에 의존하길 좋아함.
- 대중들이 선호하는 스타의 기용 기피.
- 프랑스 영화의 상징주의 사라짐.
- 영화감독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를 표현하는 것.
- '지금 여기'에서 벌어지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다룸.
- 누벨 바그는 당대의 풍속을 증언할 뿐 정치 사회적인 내용과 무관함.
- 누벨 바그 운동의 배경
- 1953년 이후 프랑스 정부의 사전제작지원금 제공. 이로 인해 그때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젊고 재능 있는 감독들에게 영화제작의 기회가 주어짐. 이로써 누벨 바그라는 새로운 영화 운동이 발전하게 되고 새로운 감독들이 영화판을 차지하게 됨.
- 필름, 카메라, 녹음기자재 등 기술의 발달. 야외촬영과 그에 따른 즉흥연출, 여러 실험적인 요소들이 영화에 도입.
- 제작자들이 젊은 영화 작가들에게 몰려듦. 흥행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보장한다는 사실이 제작자들에게는 커다란 장점으로 작용. 재능을 인정받은 젊은이들에게 영화를 찍을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이 제공됨.
- 주요 감독과 작품
- 로제 바딤 <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>(1956)
- 클로드 샤브롤 <미남 세르쥬 1959>, <사촌들 1959>
- 프랑수아 트뤼포 <400번의 구타 1959>, <피아니스트를 쏴라 1960>, <쥴 앤 짐 1961>
- 장뤼크 고다르 <네멋대로 해라 1959>, <중국 여인 1967>, <주말 1967>
- 아녜스 바르다 <짧은 송곳 1954>
프랑수아 트뤼포
[편집]Francois Roland Truffaut. 1932년 2월 6일 파리 출생.
- 쥴 앤 짐(Jules et Jim)
- 누벨바그 영화. 카메라의 움직임, 우아하고 부드러운 패닝, 미디엄 롱 쇼트, 딥 포커스, 뛰어난 서정성 등은 모두 르누아르 영화의 영향.
쥴 앤 짐
[편집]- 앙리 피에르 로슈의 자전소설을 각색한 영화. 문학적 보이스 오버와 서정적인 편집, 씌어진 내러티브와 움직이는 이미지가 조화를 이룸.
- 부르주아의 압박의 족쇄를 던져버리는 하이 모던 시대의 보헤미안식 삼각관계를 그리고 있으며, 1960년대의 새로운 감수성, 프랑스의 비판적인 젊은 세대에게서 새롭게 떠오르는 실존적이고 불경스러운 정서 구조 담아냄. 네오 모던, 모던의 부활.
- 양식화된 의상, 자유로운 이동. 트뤼포에게 역사는 전진 운동이며 회귀운동.
- 물결치는 360도 팬은 순환운동을 강화시킨다. 사물이 시간을 통과해 가고, 트리오는 늙어가고, 카트린느가 노년기를 두려워하게 됨에 따라, 이미지와 공간은 그 자체로 반복된다. 같은 집을 방문, 같은 친구를 만나고, 같은 대화를 나누고, 똑같이 갈등 어린 열정을 느낀다.[2]
뉴 이탈리언 시네마
[편집]배경
[편집]-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, 이탈리아에서 전쟁의 후유증은 점차 사라지고, 경제가 회복됨. 이탈리아 전역이 산업화와 공업화의 물결.
- 도시의 번성과 함께 수많은 영화제작자, 감독, 배우들이 로마로 모여듦.
- 경제 부흥을 배경 삼아 다시 한번 황금기 맞이함.
특성
[편집]- 이탈리아 영화의 관심은 농촌에서 도시로, 노동계층에서 부르주아로, 현실에서 개인의 내면으로 변화.
- 새로운 영화의 감독들은 시대의 궁핍함이나 사회제도의 열악함을 기록하기보다는 인간의 본성과 의사소통의 불가능성, 무기력한 현대인의 삶을 그리는데 주력.
- 신인 감독들이 새로운 양식들을 선보이며 영화계에 대거 진출: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, 에르마노 올미,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, 타비아니 형제 등.
- 혁신적인 테마와 독창적인 스타일로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다양하게 해석.
- 네오 리얼리즘처럼 느슨한 플롯의 구조 선호.
- 외부의 객관적인 현실을 진지하게 바라보지만, 직접적으로 현실에 참여하는 대신 그것을 세밀히 관찰함으로써 이전 세대의 위대한 영화들을 초월하고자 함.
- 프랑스의 누벨 바그 영화처럼 이전 세대와의 극단적인 단절을 선언하기보다는 선배작가들의 고민을 공유하면서 그 전통을 더 세련화시킴.
- 주요 감독과 작품
- 루키노 비스콘티 <로코와 그 형제들 1960>
- 페데리코 펠리니 <달콤한 인생 1960>, <8과 1/2 1963>
-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<정사 1960>, <밤 1961>
-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<아카토네 1961>, <마태복음 1964>
뉴 저먼 시네마
[편집]용어
[편집]- 서독에서 60년대 초반 이후 80년대 초까지 대략 20여 년간 영화 부흥을 가져왔던 운동을 지칭.
- 이 명칭은 기존의 독일 영화와 다른 작업을 추구한 일련의 젊은 감독들에 의해, 침체에 빠진 독일 영화가 소생된 것을 가리킴.
-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이나, 프랑스의 누벨 바그와는 달리, 특정한 양식을 지닌 사조가 아니며, 공통적인 양식을 가진 감독들을 지칭하지도 않는다.
뉴저먼 시네마 감독의 특징
[편집]- 1940년 이후에 출생한 전후 세대.
- 과거 독일의 역사에 비판적인 관점을 지님.
- 각기 다양한 양식으로 활동하면서 기존의 영화제작 방식을 거부하고 보다 독립적인 제작과 배급 방식을 추구. 자주적인 배급을 위해서 서로 연계.
- 단편 영화들을 만들며 외국에서 인정을 받은 일련의 젊은 영화인들은 영화의 제작과 영화작품의 혁신을 통해서 돌파구를 찾고자 함.
- 뉴저먼 시네마의 제1세대
- 1962년 오버하우젠 영화제에 모인 26명의 단편 및 기록영화 감독들, 카메라맨, 영화음악 작곡가 등은 "아버지의 영화는 죽었다"고 외치며, 기존의 영화제작 방식과 미학을 명백히 거부하고, 새로운 관점으로 영화를 만들 것을 선언.
- 알렉산더 클루게, 에드가 라이츠, 페터 샤모니, 보리스 폰 보레스홀름 등.
- 제작방식과 미학에서 '노후하고 문제 많은' 과거의 영화와 명백하게 결별하려는 의지를 표명.
- 초기 뉴저먼 시네마의 영화인들은 주로 단편과 기록 영화들을 제작.
- 우선적으로 나치 이전 과거의 전통을 회복.
- 현재 사회와 대결.
- 독일 역사문제를 다양한 차원에서 논의.
- 단편과 기록영화들을 통해 희망을 일깨워줌으로써 이후의 극영화 제작에 긍정적 영향 미침.
- 역사 비판적
- 나치를 경험한 기성 세대를 거부하고자 하는 의식.
-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세대는 60년대 좌파운동의 영향을 받아서 역사비판적 성향을 드러냄.
- 뉴 저먼 시네마 제 2세대
- 60년대 후반에 젊은 시절을 보낸 학생운동 세대.
뉴 저먼 시네마 작품의 특징
[편집]- 주로 당대의 지식층 관객들과의 소통을 목표로 함. 상업성을 띠지 않음.
- 근본적으로 할리우드 영화와 자국의 상업영화와 거리를 두고자 함.
- 뉴 저먼 시네마 감독들이 표방한 '작가영화'에 대한 개념:
- 좌파적 성향의 감독들은 작가영화를 자신들의 사회비판적 입장을 전달하기 위한 무대로 여김.
- 중심적 관심은 내용과 형식, 주제와 태도, 스토리와 양식의 통일로서 미학적 표현이 아닌, 흥미로운 소재.
- 70년대에 외국의 예술영화관에서 가장 널리 상영되는 영화가 됨.
뉴 저먼 시네마의 쇠퇴
[편집]- 70년대 중반 이후 서독 사회가 좌-우의 극한 대립으로 경색되어 가자, 진보적인 분위기가 쇠퇴.
- 시민들의 정치적 무관심, 1982년 파스빈더의 죽음, 사회민주당의 실각으로 뉴저먼 시네마 퇴조.
주요 감독과 영화
[편집]- 알렉산더 클루게 <어제의 소녀 1966>, <가을의 독일 1977>
- 장 마리 슈트라우프 <불만 1966>, 폴커 슐렌도르프 <양철북 1979>
- 베르너 헤어초크 <아귀레, 신의 분노 1973>
-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<마리아 브라운의 결혼 1978>[3]
영국 프리 시네마
[편집]개념
[편집]- 영국의 영화산업은 1950년대 중반 좌경적인 정치분위기로부터 영국 특유의 사실주의 전통이 부활.
- 젊은 비평가와 감독들이 주체가 되어 "프리 시네마"라는 다큐멘터리 운동 시작.
- 프리 시네마 운동에는 "자유에 대한, 인간에 대한, 그리고 일상생활의 중요성에 대한 믿음"이 내재되어 있음.
- 그들이 주창한 자유란 개인적인 생각을 ‘개인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’와 ‘상업적인 제작시스템의 구속으로부터의 자유’를 의미.
작품의 특징
[편집]- 독립제작의 방식을 취함.
- 노동문제나 계급문제를 표출한 것이 주종을 이룸.
- 영화작가는 현실과 사회를 비판해야 하며, 동시대의 영국 사회를 솔직하게 관찰하고 탐구하는 사회의 논논평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.
- 공동체에 대한 관심과 청년문화에 탐닉.
- 노동계급을 다루되, 전통적인 다큐멘터리에서 노동생활을 보여 준 것과는 달리, 프리 시네마 영화에서는 오히려 여가시간에 초점을 맞춤.
- 대체로 무정부주의적, 허무적인 태도.
- 비교훈적, 탐미적인 접근 방식.
프리 시네마의 한계
[편집]- 정의와 개념이 뚜렷한 의미를 형성하지 못함.
- 소수 작가의 개인적인 노력과 작품에만 의존했기 때문에 하나의 유파로서 그 영향력을 지속할 수 없었다.
주요 감독과 영화
[편집]- 엔더슨 <오, 꿈의 나라 1954>
- 카렐 라이츠 <우리는 램베스의 소년들 1959>
- 토니 리처드슨 <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 1960>, <꿀맛 1961>
- 스티븐 프리어즈 <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1985>[4]